중국과 대만의 동상이몽, 양안협상[兩岸協商]
중국과 대만의 동상이몽, 양안협상[兩岸協商]
  • 강병환 논설위원장
  • 승인 2019.09.30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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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대만이 생각하는 양안은 서로 달라
양안협상 제대로 알아야

(칼럼=YBS뉴스통신) 강병환 논설위원장 = 양안협상은 타이완해협을 사이에 둔 중국과 타이완의 협상을 말한다.

그동안 양안의 협상 추진 목적은 서로 달랐다. ‘타이완과의 통일’이라는 베이징의 목적은 명확했다. 이에 비해 타이완은 양안협상에 상당한 경계심을 지니고 있었다. 과거의 역사적 경험 때문이었다. 1924∼27년 반제통일전선과 군벌타도 목적으로 한 1차 국공합작, 1927∼37년의 1차 국공내전, 1937∼45년 항일을 위한 2차 국공합작, 1946-49년 사이의 2차 국공내전, 결국 국민당은 공산당에 패해 타이완으로 도망 올 수밖에 없었다. 이후 38년 동안 첨예한 대치를 이어가다 결국 1987년 양안은 개방되었다.

이로 인해 파생된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협상이 불가피했다. 아울러 타이완은 중국대륙 시장이라는 경제적 이익 또한 경시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양안은 30여 개의 협의를 하였다. 1986년의 중화항공 민항기 망명 사건, 1990년 진먼(金門)협의 등 돌발적이고 우연한 사건의 발발로 인해 맺었던 협정을 제외하면 1991년 양안 간에 협상창구가 개설되고 나서부터 주로 체결되었다. 1993년에 4개의 협의서에, 국민당 마잉주 집권기(2008∼2016년 초)에 양안은 23개의 협의에 서명하였다.

 

타이완 집권당과 중국공산당 사이에서 전개되는 체제 간의 대화와 경쟁

협상은 상대의 배트나(BATNA,Best Alternative To Negotiated Agreement)를 알아내는 일이다. 배트나는 협상결렬시의 차선책이다. (사진=m.tobo1688)
협상은 상대의 배트나(BATNA,Best Alternative To Negotiated Agreement)를 알아내는 일이다. 배트나는 협상결렬시의 차선책이다. (사진=m.tobo1688)

협상은 바둑과 같다. 지적게임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는다. 전쟁, 폭력, 법률, 중재에 의한 해결이 아니다. 그래서 협상(negotiation)의 어원은 ‘쉽지 않다(not easy)’라는 뜻이다. 협상은 공동의 결정 과정이다. 협의는 공통의 인식으로 체결된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어느 한쪽이라도 해결방안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협상은 실패로 끝난다. 그러므로 협상은 상호의존적이다.

1987년 양안은 개방되었다. 이후 40년이 흘렀다. 양안협상은 국내외적인 상황에 따라 재개와 중단을 반복했다. 양안협상에서 타이완은 항상 소극적이고 피동적이었다. 이는 타이완 내부의 정치경제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타이완 내부에는 공통의 인식이 결핍되어 있다.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퍼트넘(Robert Putnam)이 말한 ‘양면(two level) 협상’이 적용된다. 협상 상대와도 이겨야 하지만 국내의 반대파도 극복해야 한다.

또한 소(小)가 대(大)와 경쟁하는 열세의 처지에 있다. 이는 양안 간 협상역량의 비대칭과 관계된다. 협상에는 공격이 있고 방어가 있으며, 득이 있고 실이 있다. 통상적으로 큰 협상권력을 가진 측은 강세를 보이고 약자는 순종한다. 하지만 약자라고 해서 협상에서 이기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양안협상에서도 오히려 타이완이 이긴 경우가 많다.

그동안의 양안협상은 대략 네 단계로 분류할 수 있다. 1987~1992년은 준비기였다. 서로 협상창구를 만들고, 공식적인 첫 회담을 위한 예비회담을 열었다. 1993~2008년의 15년 동안은 마찰기였다. 군사위기도 있었다. 1998~2008년에는 협상이 완전히 중단되기도 했다. 2008~2016년은 도약기였다. 국민당의 마잉주(馬英九)가 재집권했고, 양안 간에 2개의 공식(consensus)과 23개의 협정이 체결되었다.

2016년 이후에는 냉각기다. 타이완의 독립을 강령으로 채택하고 있는 민진당이 재집권했고, 차이잉원(蔡英文) 정부는 1992년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있었던 ‘양안은 하나의 중국’이라고 합의한 ‘92공식(1992 consensus)’을 인정하지 않는다. 기존에 제도화된 모든 협상채널은 중단되었다. 베이징이 ‘92공식’의 인정을 협상재개의 전제조건으로 삼기 때문이다. 결국 양안협상은 타이완의 집권당과 중국공산당 사이에서 전개되는 체제 간의 대화와 경쟁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와 경제 의제를 분리해, 반민반관의 양회가 경제협상을 주도한다

지난 2015년 11월 7일, 싱가포르에서 양안의 최고지도자가 66년 만에 만났다. 하지만 서로 어떤 협의도 공동성명도 없었다. (사진=media.sohu)
지난 2015년 11월 7일, 싱가포르에서 양안의 최고지도자가 66년 만에 만났다. 하지만 서로 어떤 협의도 공동성명도 없었다. (사진=media.sohu)

양안협상은 대체로 사무성 협상과 정치성 협상,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사무성 협상은 기능적이고 경제적인 의제가 주를 이루는 데 비해, 정치성 협상은 주권, 통일, 독립 등 양안의 정치관계 의제에 관한 협상이다.

중국이 밝힌 정치협상 의제는 양안의 평화통일, 국기․국가․국호 문제, 양안 최고지도자 방문, 타이완의 정치지위, 공식적인 적대상태 종결, 평화협정 체결, 타이완의 국제 공간, 난사군도와 댜오위다오 문제에서의 양안 협력 등이다. 타이완은 정치성 의제에는 소극적이었다. 주로 경제적인 문제에 치중했다. 따라서 지금까지 양안이 체결한 모든 협의는 사무성 협상의 의제였다.

양안협상의 특징으로 다음 여섯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양안협상에는 양회(타이완의 해협교류기금회, 중국의 해협양안관계협회)라는 반민반관(半民半官)의 1.5트랙 협상주체들이 참여한다. 양회는 정부로부터 위임을 받아 권한을 행사한다. 중국과 타이완은 이 두 기구를 적극 활용해 협정을 체결했다. 이를 계기로 양안 간의 교류가 증가하자, 2014년 2월 처음으로 1트랙의 관대관(官對官) 회담이 성사되었다. 타이완 행정원 대륙위원회 주임 왕위치(王郁琦)와 중국 국무원 타이완사무판공실 주임 장즈쥔(張志軍)이 난징에서 만났다.

지금까지 정치적 의제에 관한 협상은 없었지만, 2015년 11월에 있었던 양안 간 최고지도자 회담인 ‘시마회(시진핑과 마잉주)’는 초보적인 정치협상으로 분류할 수 있다.

둘째, 정경분리(政經分離) 원칙이다. 마잉주 집권기에 체결된 23개의 협정은 전부 경제적 의제였다. ECFA(경제협력기본협정)와 양안 직항 문제도 경제적인 의제로 분류되었다. 정치적 의제는 양회에서 결정할 수 없다고 판단한 베이징은, 정치 의제와 비정치 의제를 분리했다. 정치 의제는 양안의 사무 주관기구인 타이완행정원 대륙위원회와 중국 국무원 타이완사무판공실이 진행하며, 비정치 의제는 여전히 양회에서 진행하도록 한 것이다. 베이징의 이런 전략적 분리는, 정치 의제에 관한 협상을 진행하고자 하는 것이었지만, 국민당은 정치 의제를 토론하기 전에 통치권에 대한 승인을 얻고자 했다.

 

현재 꼭 필요하고 실용적이며 쉬운 의제부터 먼저 협상한다

1987년 롱민(荣民, 국민당 군대에서 복무하다가 타이완으로 온 군인)들이 타이완적십자사에 중국 방문을 신청하고 있다. (사진=merit-times)
1987년 롱민(荣民, 국민당 군대에서 복무하다가 타이완으로 온 군인)들이 타이완적십자사에 중국 방문을 신청하고 있다. (사진=merit-times)

양안협상의 세 번째 특징은 선경후정(先經後政)이다. 경제 분야에서 우선 협정을 체결하고, 그 후에 평화협정 체결을 시도하고자 한다. 2005년 후진타오 중국공산당 총서기와 롄잔(連戰) 중국국민당 주석이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만났다. 1945년 국민당의 장제스와 공산당의 마오저뚱의 충칭담판(重慶談判) 이후 거행된 양당 최고 수장 사이의 회담이었다. 회견을 마친 후 신문공보의 방식으로 양안협상재개, 양안교류, 협력 등 5개항의 연합성명을 공동으로 발표했다. 이는 2008년 국민당의 마잉주가 재집권하고 나서 평화협정체결을 제외하고 대부분 실현되었다. 하지만 이후 양안협상은 정치협상 단계에 진입할 즈음 꺾이고 말았다. 타이완의 ‘태양화운동’(2014년 학생들의 국회 점거 사건)과 2014년 11월 국민당의 지방선거 참패, 이어진 민진당의 재집권으로 양안협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넷째, 선이후난(先易後難)이다. 구체적이고 실용적이며 쉬운 의제부터 먼저 협상에 착수하고 추상적이고 어려운 문제는 후일로 넘기는 것이다. 양회 첫 회담에서 타결된 협정은 대륙 관광객의 타이완 여행과 배우자 결혼, 학생의 타이완 유학 등 비교적 쉬운 문제들이었다.

다섯째, 선급후완(先急後緩)이다. 현재 꼭 필요하고 급한 의제를 먼저 선택해 체결했다. 양안 간 교류가 증대된 계기가 1987년 타이완의 ‘대륙탐친’(친척 방문)으로, 인도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고향 방문이었다. 양안은 모두 실용적인 입장에서 이 문제에 접근했다.

여섯째, 중국의 양보(讓利)다. 지금까지 체결된 경제협상을 분석해보면, 중국이 비교적 많이 양보해왔다. 이는 동독과 서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동독이 요구하지 않아도, 서독은 선제적으로 동독 제품에 대해서 무관세 조치를 취했다. 이런 조치들은 중국의 심모원려(深謀遠慮)한 전략에서 나왔다. 중국은 타이완과의 교역에서 발생하는 경제적자는 정치흑자로 만회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다시 말해, 중국은 ‘중화민족 대부흥’이란 미래의 관점에서 협상에 임하고 있는 것이다.

 

각치쟁의(1992~2000)와 상랭하열(2000~2008)의 시기

동상이몽, ‘하나의 중국’에 대해서 공산당, 국민당, 민진당 간에 각각 해석이 다르다.(사진=8toutiao)
동상이몽, ‘하나의 중국’에 대해서 공산당, 국민당, 민진당 간에 각각 해석이 다르다.(사진=8toutiao)

2000년 민진당이 총통선거에서 승리한 후 정권인수를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상황에서 당시 국민당 대륙위원회 주임인 쑤치(蘇起)는 1992년국공양당의 홍콩회담의 내용을 ‘92공식’으로 명명했다. 민진당이 집권하면, 민진당과 공산당 양쪽 다 ‘하나의 중국 원칙’에 민감하기 때문에 중성적인 단어로 포장한 것이다. 1992년 당시 양안협상의 실무진들은 ‘하나의 중국 원칙’에 관한 묵계가 있었지만, 각각 그 이해가 달랐다. 국민당은 일중각표(一中各表)로, 하나의 중국에 대해서 각자 표술하고 공산당은 ‘하나의 중국 원칙’의 견지를 의미했다.

무엇보다 당시 협상의 최고결정권자인 총통 리덩후이(李登輝), 해협교류기금회(해기회) 회장 구전푸(辜振甫), 대륙위원회 주임위원 황쿤후이(黃昆輝) 등이 모두 ‘92공식’을 부정했다. 2016년 5월 총통으로 취임한 차이잉원도 지금까지 ‘92공식’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현재 ‘92공식’의 승인 여부가 양안 대화의 전제조건이 되고 있다.

그러나 1992년 당시 양안은 ‘하나의 중국 원칙’ 문제를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았다. 불을 보듯 뻔한 결론이었기 때문이다. 다툼이 있는 문제는 한쪽으로 제쳐둔다는 각치쟁의(擱置爭議), 쉬운 문제 먼저 푼다는 선이후난 등 중국 특유의 협상 가치관이 투영된 것이다.

‘92공식’은 2000년 이전까지 방치된 채로 있었다. 불신관계의 두 진영이 나름의 실용적․현실주의적 계산을 했기 때문이다. 즉 ‘하나의 중국’에 대해서는 ‘불일치의 일치(agree to disagree)’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2000년 타이완 독립을 강령으로 채택하고 있는 민진당이 집권하자, 2008년까지 양안 간에는 정치적 긴장이 급속히 형성되었다. ‘타이완 독립’이란 말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정면으로 위배하기 때문이었다. 2003~2004년에는 군사적 긴장도 형성되었다. 그렇게 정부와 관방의 왕래는 완전히 봉쇄되었지만, 민간의 교류는 막지 못했다. 민진당 시기에도 중국의 샤먼(廈門) 대만의 진먼(金門),중국의 마웨이(馬尾) 대만의 마주(馬祖) 사이에 통상, 통항, 통우, 이른바 소삼통이 시범적으로 실시되어 자유롭게 왕래했다. 물론 이는 마잉주가 전면적으로 대삼통(통상, 통항, 통우)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2008~2015년, 중국의 선경촉통과 타이완의 선경후정이 맞아떨어지다

지난 2008년 양회의 수장, 해협회 천윈린(陈云林) 회장과(왼쪽) 해기회 쟝빙쿤(江丙坤) 이사장이 악수하고 있다. (사진=oeeee)
지난 2008년 양회의 수장, 해협회 천윈린(陈云林) 회장과(왼쪽) 해기회 쟝빙쿤(江丙坤) 이사장이 악수하고 있다. (사진=oeeee)

2008년 5월 20일 국민당 마잉주가 타이완 총통으로 취임했다. 경선 당시 약속했던 ‘92공식’ 승인과 양안협상 재개를 이행했다. 2008년 6월 13일부터 2015년 1월까지 양회가 11차례의 협상을 통해 대삼통, 경제협력기본협정(ECFA)을 비롯해 23개의 협정을 체결했고, 2개의 공식(陸資來台投資事宜達成共識, 人身自由與安全保障共識)을 달성했다.

이렇게 급속하게 양안협상이 진척된 것은 서로의 이익이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관도 민도 양안교류와 협상을 원하고 있었다. 양안은 이른바 상열하열(上熱下熱), 정열경영(政熱經熱)의 단계에 들어섰다. 경제영역에서의 양안협상은 공통적인 이익의 기초를 지니고 있다. 그 결과 양안은 경제무역 방면의 발전에 관해서 쉽게 협상을 할 수 있다. 중국의 ‘경제로 통일을 촉진’하는 선경촉통(先經促統)과 국민당의 ‘경제적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자 하는 선경후정(先經後政)이 타협한 결과였다.

특히 23개 협정의 특징은 중국의 타이완에 대한 양보다. 이는 경제적 실리를 바라는 국민당의 입장과, 경제적인 적자를 정치적인 흑자로 만회할 수 있다는 공산당의 입장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마잉주 집권기에 속도와 깊이에 있어서 급격하게 양안협상이 진전되었다. 그 결과, 무역규모는 2,000억 달러를 초과했고, 타이완의 중국에 대한 무역의존도는 40%로 치솟았다. 양안 간 항공편만 해도, 타이완의 10개 지점과 중국의 54개 지점을 연결해, 매주 700편 이상이 운항되었다. 양안 간에 결혼한 부부의 공식적 통계도 지금까지 33만 쌍을 넘어섰다. 중국에 진출한 타이상(台商)도 150만 정도로 추정된다. 타이완에 온 중국 유학생 수도 점차 증가했다.

그러나 타이완의 민생은 과거와 비해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이는 분배보다는 성장을, 형평성보다는 효율성을 우선시한 국민당의 정책 실패를 의미한다. 중국도 이런 점을 눈치채고 뒤늦게 ‘삼중일청(三中一靑)’ 정책을 시행했다. 기존의 대기업 위주 교류에서 벗어나 타이완의 중소기업, 중남부, 중산계층, 청년들에게 더 혜택이 가도록 정책을 조정했으나 그 성과는 미미했다.

 

2016년, 차이잉원 정부 출범 이후 양안 간의 관계는 현상유지

차이잉원. 2016년 5월 취임한 타이완 총통 차이잉원은 중국이 주장하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인정하지 않는다. (사진=대만 외교부)
차이잉원. 2016년 5월 취임한 타이완 총통 차이잉원은 중국이 주장하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인정하지 않는다. (사진=대만 외교부)

2016년 민진당이 재집권했다. 차이잉원은 양안 간의 ‘현상유지’를 공약했고, 경제적으로는 ‘신남향정책(新南向政策)’을 채택했다. 단순히 동남아 투자를 늘리는 리등후이 시기의 남진정책(南進政策)에서 벗어나 중국과 비교적 불편한 관계에 있는 인도와 인도네시아를 기점으로 동남아 국가들과 다원적·다층적 협력을 통해 중국에 대한 과도한 경제 의존을 줄이려는 새 전략이다.

타이완이 지나치게 중국에 의존하는 현상을 방지하고, 급격한 통일도 급격한 독립도 피하며, 당분간 현상유지하고자 한다. 이는 대만의 민의에도 부합된다. ‘하나의 중국 원칙’을 인정하지 않는 차이잉원 정부가 들어선 후 양안 간에 제도화된 모든 협상은 중단되었다.

지금까지 양안이 체결한 협상은 모두 기능적이고 경제적인 사무성 의제에 관한 것이었다. 양안은 실용적 관점에서 협상에 임했다. 의제를 정치와 경제로 분리하고(政經分離), 쉬운 문제를 먼저 풀며(先易後難), 급한 일을 먼저 처리하고(先急後緩), 경제를 앞세우고 정치를 뒤로 돌리며(先經後政), 다툼이 있는 문제는 유보한다(擱置爭議)는 잠재적 합의가 있었다. 특히 중국은 경제적인 적자를 정치적인 흑자로 만회할 수 있다는 전략이 있었고, 타이완은 정치적인 문제보다는 경제적인 문제를 먼저 협상한다는 방침이 있었다.

양안협상은 지금까지 인도적인 것, 비정치적인 것, 경제적인 것, 문화적인 것에 초점을 맞춰 40여 년간 발전해왔다. 그러나 정치는 경제에 영향을 미치고 경제는 정치에 작용한다. 2016년 3월 중국이 주장하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인정하지 않는 차이잉원이 총통으로 취임하면서, 양안 간의 협상은 모두 중단되었고 양안의 무역총액은 줄어들었다. 향후 양안협상이 재개되더라도, 더는 정치적인 것(政), 어려운 것(難), 장기적으로 해결해야 할 것(緩)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양안 협상의 시사점

(사진=게티이미지)
(사진=게티이미지)

중국이 국가 간 진행한 협상은 첫째, 강대국과의 협상(미국, 소련), 둘째, 중국과 국력이 대등한 협상(일본 및 서유럽) 셋째, 대국형 협상(제3세계), 넷째, 중대한 국익이 걸린 강소국들과의 협상(한국, 북한, 대만, 동남아 국가) 등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중국의 협상 태도와 전략의 응용은 협상의 의제, 중요성, 중국의 내부정치, 국제 규범의 숙지 정도, 협상 상대와의 관계, 다자 혹은 양자 협상, 기술적 혹은 정치적 특성의 차이에 따라서 다소 다르다.

하지만 이를 종합하여 중국의 협상 유형을 분류한다면, 중국협상의 기본 모델은 적대적 협상, 충돌하고 협력하는 협상, 양보형(조공형) 협상의 3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적대적 협상은 충돌을 확산시킬 목적이거나 협상 타결의 가능성이 요원하다고 판단될 때 진행하는 협상이다. 적대적 협상의 유형으로서 한국전쟁의 정전 협상과 1955년부터 1970년까지 중미 간의 136차례의 대사급 회담이 대표적이다. 충돌하고 협력하는 협상의 유형은 쌍방이 공동의 이익을 구비하면서도 또 쌍방 이익이 충돌하는 유형이다. 이 유형으로는 중국과 영국이 홍콩반환 문제를 둘러싸고 맺은 홍콩 반환협정과 1972년 중미 간의 상하이 코뮤니케 협상이 대표적이다. 세 번째 유형인 양보형 협상은 다시 말해 조공식 협상을 의미한다. 정치이익을 위해 경제이익을 희생하는 유형의 협상이다. 경제적인 적자는 훗날 정치적인 흑자로 만회할 수 있다고 본다.

양보(조공)형 협상의 대표적인 예로는 2018년 중-아프리카 협력포럼(FOCAC)에서 아프리카 제국들과 중국이 일대일로(一帶一路) 문제로 체결한 협약과 마잉주 시기(2008년-2016) 양안 간에 맺었던 23개 항의 협정이 대표적이다. 사실 양안 협상은 경제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중국에 오히려 손해다. 중국은 대만과의 통일이라는 먼 전략적 비전을 가지고 협상에 임했으며, 주권 문제에 관계되지 않는 한 대부분 대만에 양보하는 형태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2016년 대만독립을 당강(黨綱)으로 채택하고 있는 민진당이 대만의 집권당이 되자, 기존에 이어져 오던 양안 간의 제도적 협상은 모두 중단되었을 뿐만 아니라 트럼프의 인·태 전략에 차이잉원이 적극적으로 호응하면서 양안은 또다시 리볜시기(리등후이, 천쉐이볜 시기 1988-2008)로 회귀하고 있다.

 

<편집자 주 : YBS뉴스통신 강병환 논설위원장은 대만국립중산대학교 중국-아태연구소(Institute of China and Asia-Pacific Studies)에서 중국의 대(對)대만정책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중관계협회(www.arako.kr) 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양안관계, 중국협상, 아-태 안보, 중국정치, 중미관계이며, 최근에는 양안관계의 통일과 남북통일문제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一個中國架構下中共對台政策-以民進黨執政時期爲中心」(박사학위 논문),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과 중국의 대응-해상패권경쟁과 갈등을 중심으로」(중소연구, 2014), 「시진핑 출범 이후 중국 방송정책의 특징과 변화」(언론학연구, 2015)등이 있다.

저서 『시진핑 체제 이후 중국 방송정책의 변화』(방송문화진흥회, 2016), 역서 『중국을 다룬다-대중국협상과 전략』(학고방,2017) 등이 있다.>

강병환 논설위원장
강병환 논설위원장 논설위원장/대만국립중산대 박사, 한중관계협회장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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